성녀 베로니카

 

                 성 론지노

 

                   중앙 돔

 

                        성당 내 작은 돔 천장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

 

미켈란젤로(1475-1564)는 그의 나이 25살 때에 이 작품을 완성하게 되었다. 이 작품은 피렌체에서 보관중인 다비드상, 그리고 로마 성베드로의 쇠사슬 성당에서 보관중인 모세상과 더불어 그의 3대 작품에 들어간다.(피에타: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

이 상은 미켈란젤로의 작품중 유일하게 그의 서명을 남긴 작품이기도 하다. 돌아가신 예수님을 무릎에 안은 성모님의 얼굴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아들 예수님의 나이에 비해 너무나 젊은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렇게 성모님의 얼굴이 젊게 표현된 이유를 미켈란젤로의 제자였던 아스카니오 카우디비가 그의 스승에게 물었을 때,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아스카니오, 너는 아직도 모르느냐? 정결한 여자들은 무릇 그 정결함을 고귀하게 유지시켜야 하지 않겠느냐? 하물며 동정녀로서 잉태 하신 성모님의 정결함은 세상의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지 않겠느냐?

천주의 모친이신 성모님의 모습을 젊고 아름답게 표현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아라. 그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람과 똑같은 모습으로 세상에 파견되었으며, 사람들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시는 고통을 받으셨다. 그분의 처절한 모습을 재현함으로써 그분을 보는 이들로 하여금 양심의 성찰을 일으키게 하려는 것이 바로 나의 의도이다."

우리는 한 예술가를 재조명해보면서 르네상스의 마지막 대가였던 미켈란젤로를 그저 조각가나 건축설계사로만 볼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예술 세계는 바로 그의 깊은 신앙심의 바탕 안에서 이루어 졌으며, 그러기에 몇백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경이적인 찬탄을 받고 있는 것이다.

 

                  발다키노 (베르니니의 천개)

 

 

이 천개야말로 베르니니의 작품중 걸작이라 할 수 있다. 교황 우르바누스 8세(1568-1644)의 명에 의해 제작된 이것은, 그 위에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거대한 돔과 함께 성베드로 대성당뿐 아니라 이탈리아 전역에서 르네상스와 바로크의 양대 예술 양식중 최고의 예술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 천개를 제작하기 위해 필요했던 막대한 양의 청동 금속은 이탈리아에서 모아졌는데, 그 중에서도 베네치아 지방에서 많은 양이 왔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모아진 금속의 양은 211, 427파운드에 달하였다. 그런데도 양이 부족하자, 마침내는 로마에 있는 기원전 1세기 때의 신전인 판테온의 내부 천장 의 청동을 떼어서 충당하기도 하였다. 바로 이 때문에 그 당시부터 지금까지 비판의 소지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당시의 로마인들은 "이것은 바르바리 (야만인이라는 뜻)가 한 게 아니라, 바르베리니(교황의 가문)가 한 일이다." 라는 말로써 교황을 비꼬기도 하였다.

이 천개를 직접 구상하고 설계한 베르니니는 후에 자신의 아이디어는 인간의 영혼이 하늘로 올려지는 것에서 착안되었다고 했다. 내부 중앙에는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 가 성령의 빛을 드러내는 모습으로 부조되어 있고, 위쪽으로는 네 명의 천사가 화관(花冠) 하늘로 끌어올리는 모습이 부조되어 있다. 또 다른 작은 천사 들은 삼중관과 열쇠, 칼 그리고 복음을 들고 있다.

 

이중에서 삼중관과 열쇠는 사도 베드로 를 상징하며, 칼과 복음은 사도 바울을 상징하는 것이다.

 

                        성 베드로의 청동상

 

이는 아르놀포 디 캄비오(1245-1302)의 작품으로, 작가는 현재 베드로 대성당 지하 무덤 출구 앞에 놓여 있는 성베드로의 오래된 대리석상(5세기경으로 추정)에서 영감을 얻어, 이와 비슷하게 청동으로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중세기 때부터 이곳을 찾는 수많은 순례자들이, 특히 이 청동상의 발에 입맞추며 기도를 바치는 전통 때문에, 현재 오른쪽 발가락은 거의 다 닳아서 그 원 모양이 없어지고, 이제는 왼쪽발가락도 많이 닳은 상태이다. 이는 1857년 3월 15일, 교황 비오 9세가 특별한 회칙을 통해 이날부터 50일간을 임시 성년으로 반포하며, 베드로 대성당에 와서 이 동상의 발에 입맞춤 해야 전대사를 받을 수 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유럽 전역의 많은 순례자들이 이 기간 동안 한꺼번에 몰려들어 사도의 오른쪽 발등에 입맞춤하는 바람에 발등이 심하게 닳았다고 한다.

이는 아르놀포 디 캄비오(1245-1302)의 작품으로, 작가는 현재 베드로 대성당 지하 무덤 출구 앞에 놓여 있는 성베드로의 오래된 대리석상(5세기경으로 추정)에서 영감을 얻어, 이와 비슷하게 청동으로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중세기 때부터 이곳을 찾는 수많은 순례자들이, 특히 이 청동상의 발에 입맞추며 기도를 바치는 전통 때문에, 현재 오른쪽 발가락은 거의 다 닳아서 그 원 모양이 없어지고, 이제는 왼쪽발가락도 많이 닳은 상태이다. 이는 1857년 3월 15일, 교황 비오 9세가 특별한 회칙을 통해 이날부터 50일간을 임시 성년으로 반포하며, 베드로 대성당에 와서 이 동상의 발에 입맞춤 해야 전대사를 받을 수 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유럽 전역의 많은 순례자들이 이 기간 동안 한꺼번에 몰려들어 사도의 오른쪽 발등에 입맞춤하는 바람에 발등이 심하게 닳았다고 한다.

 

                        예수의 영광스러운 변모 제대

 

                         오벨리스크

 

오벨리스크 광장 한가운데에 우뚝 솟아 있는 오벨리스크는 원래는 현재의 정면을 바라보면서 왼쪽에 있었던 것으로, 1세기 때의 로마 황제 가이오와 네로의 경기장 가운데에 장식을 위해 설치 되어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초기에 기념 교회를 세우면서 경기장은 모두 없앴으나 탑만은 계속 남겨 두었다. 이를 교황 식스투스 5세의 명에 의해 1586년 4월 30일 이전 공사를 시작하여 약 130여일 후 같은 해인 9월 10일, 현재의 위치에 세우게 되었다. 탑의 높이만 해도 25미터로 로마에 있는 오벨리스크 탑들중 두번째로 높으며, 무게는 약 300톤이나 된다. 이 거대한 탑을 옮기기 위해 그 당시 건축 설계자였던 도메니코 폰타나가 책임자로 선임 되었고, 그의 지휘로 900여 명의 인부와, 말 140여마리 그리고 47대의 권선기를 동원하여 이 어려운 이전 작업을 해냈다고 한다. 이렇게 옮겨 놓은 오벨리스크 탑 위에 십자가를 올려놓음으로써 이 탑은 그리스도의 승리를 상징하게 됐는데, 한편 으로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로마제국 시절 그리스도교에 첫 박해를 시작했던 네로가 권력의 상징으로 아끼고 좋아했던 이 오벨리스크 탑을 이곳 광장의 중심에 옮겨 놓은 이유는 광장을 장식하거나 해시계의 기능을 갖추기 위한 것보다는, 더욱 심층적으로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의 정신을 이곳에 오는 모든 순례자 들에게 일깨워 주기 위한 것이라 생각된다

 

 

 

 분수 야경

 

 

 성문 (대 희년 문)

 

 

다섯개의 문중 가운데 있는 중앙 정문이 유일하게 옛 성당 때부터 있었던 청동문으로 피렌체 사람 안토니오 아베룰리노가 1455년에 제작한 것이다. 이 중앙 정문의 표면에는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 위쪽에 부조되어 있고, 그 아래에 베드로와 바울 두 사도의 모습이 자리잡고 있다. 이 부조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리스도께서는 강복하는 모습을 하고 있고, 성모 마리아는 겸손한 자세로 그리스도를 공경하는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다.

또한 사도 베드로와 바울의 우뚝 선 모습은 거룩한 교회 안에 양 기둥이 서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 왼손에 성서를 들고 있는데, 이는 교회의 모습이 성서 안에, 즉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있어야 함을 나타내고 있다.

사도 바울은 오른손에 칼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부조되어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왜 하필이면 칼을 들고 있는 모습인지 의문을 가진다. 그 이유는 세가지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사도의 순교를 의미하며,

두 번째는 사도가 되기 전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유대교 지도층의 앞잡이가 되어 그리스도인을 잡으러 다녔을 때의 신분을 나타낸다. 세 번째는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신자답게 성령으로 무장하여 영적 투쟁을 해야 함을 의미한다.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느님의 말씀을 가지라." : 엡6.17)

 

세계 기독교의 성지 순례지

 

지금까지 우리가 함께 살펴 본 거대한 베드로 대성당은 처음 완공되던 349년부터 현재까지 세계기독교의 성지순례장소로서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것은 이곳에는 사도 베드로를 비롯 하여 초기 로마 교회의 순교자들 무덤이 안치되어 있고,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인 헬레나 성녀가 예루살렘에서 직접 가져온 십자가와 베로니카 성녀의 수건, 그리고 그리스도를 찌른 창들이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베드로 대성당의 기원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답다는 베드로 대성당의 기원은 콘스탄티누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콘스탄티누스 당시는 황제 난립 시대로 6명의 황제들이 있었다. 그중 콘스탄티누스와 막센티우스가 가장 강력했는데, 그들은 312년 10월 28일 로마의 밀비오 다리에서 전투를 벌이게 된다.

 

이 싸움에서 콘스탄티누스는 대천사 미카엘과 가브리엘의 도움으로 기적적인 승리를 얻게 된다. 그리고 그가 하느님께 약속했던 일, 즉 승리 후 그의 모친 헬레나 왕후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공경해 오던 사도 베드로와 바울의 무덤 위에 대성당을 건축할 것을 공포한다.

이렇게 성 베드로 대성당은 324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349년에 완공 되었다.

 

심인섭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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