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고산자교
두물다리
무학교
비우당교
황학교
영도교
영도교(폭 26.2m, 연장 30.1m)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귀양갈 때 그의 비인 정순왕후 송씨가 이곳까지 나와 서로 영영 이별하였다 하여 영이별다리 혹은 영영건넌다리라고 전해지는 전설에서 유래된 교량명
- 숭인동 234번지와 상왕십리 748번지 사이 현 동묘(東廟, 숭인동 22번지) 남쪽 청계천 하류에 있던 다리이다. 동대문 옆에 오간수문(五間水門)이 있어서 동대문 방면에서 왕십리 쪽을 가려면 영도교를 건너야만 되었기 때문에 이 다리의 교통량은 몹시 빈번하였다. 그리하여 성종은 절의 중들을 동원해서 살곶이다리(전곶교, 전관교)와 함께 이 곳에 돌다리로 중수(重修)하고 어필(御筆)로 ‘영도교’라 하였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그 규모가 크고 특징이 있었으리라 보인다.
한편 이 다리에 얽힌 전설로는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영월로 귀양갈 때(세조 4년, 1458) 그의 비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宋氏)가 이 곳까지 나와서 서로 영영 이별을 하였다 하여 ‘영이별다리’ 혹은 ‘영영건넌다리’라고 전해진다. 그 후 정순왕후 송씨는 지금의 청룡사 새절승방에 있던 정업원(淨業院, 현 숭인동 17번지)에 들어가서 시녀 셋을 데리고 일생을 불도(佛道)에 바쳤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영도교의 돌다리는 고종초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 헐어다가 석재로 썼기 때문에 이 때 없어졌다 한다. 그 뒤 나무다리가 놓여졌으나 가끔 떠내려 갔는지 그 옆에는 ‘띠엄돌’이라고 해서 개천 바닥에 돌을 띠엄띠엄 놓아서 이것을 밟고 건너게 한 때도 있었다.
다산교
맑은내다리
오간수교
오간수교(폭 59.9m, 연장 22.9m)
동대문에서 을지로 6가로 가는 성벽 아래 청계천 6가에 있던 다리이다.
홍예문(紅霓門)으로 다섯 칸으로 되었다 하여 "오간수다리" 또는 "오간수문" 이라 하였다
- 이 다리는 청계천 물줄기가 도성을 빠져 나가는 지점에 놓여 있던 다리이다. 즉 서울에 성곽을 쌓으면서 청계천 물이 원활하게 흘러갈 수 있도록 다섯 개의 아치형으로 된 구멍을 만들었고, 그 위로 성곽을 쌓아 올렸으며, 아치 모양의 구멍을 서로 연결하여 성벽 안쪽으로 장대석을 연결하여 다리를 놓았다. 이 다리가 동대문 옆의 오간수문을 설치한 다리이므로 오간수다리라 불렀다. 이 오간수문은 물길이 잘 빠져가기 위해 가설한 것인데 조선시대에는 도성 안에서 죄를 지은 자가 도성을 빠져 달아나든가 혹은 밤에 몰래 도성 안으로 잠입하는 사람들의 통로로 곧잘 이용되기도 하였다. 그 예로 명종 때 전국적으로 사회를 흉흉하게 만들었던 임꺽정의 무리들이 도성에 들어와 전옥서를 부수고 도망갈 때도 이 오간수문을 통해 달아났었다. 이 다리는 1907년 일제가 청계천 물이 잘 흘러가도록 한다는 미명하에 오간수문을 모두 헐어버릴 때 함께 사라지고 콘크리트 다리로 교체되었다가 후에 성곽이 훼손되는 것과 함께 오늘날에는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마전교와 오간수다리 사이에는 조선시대 때 청계천의 하상을 준설하고 여기에서 나온 흙들을 쌓아 인공적으로 만든 산인 가산(假山)이 있었다.
左측의 동대문에서 右측의 동대문 운동장 사이에 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