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2010. 2. 26.
승용차는 전자파 덩어리… 전자파로 멈춰선 KTX
한국 소비자들의 마음은 편치 않다. 일본 도요타 자동차 리콜 사태로 한국산 자동차 업체들이 쾌재를 부르고 있다는 보도에도 맘 놓고 기뻐하기 찜찜하다. 사고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 ‘전자파’가 국내 자동차 업계에도 뇌관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전자파로 인한 급발진 문제는 국내에서도 10여년을 끌어온 해묵은 논쟁이다. 이건 도요타만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세계 최고 자동차 회사 제품에서 전자파 오작동이 생긴다면….
우리 한국 자동차는 안전한가? 내 차는?
도요타 자동차 리콜… 전자파에 관한 불편한 진실
멈춰 선 KTX
2004년 4월 경부고속철도(KTX)는 개통 후 2주 만에 스무 번 멈춰 섰다. ‘짜증철’ ‘고장철’ 같은 악명이 붙기 시작했다. 철도청은 고장 원인을 찾기 위해 분주해졌다.
사고 중 14건은 문, 바퀴 등에 낀 이물질과 전력공급선에서 발견된 까치집 같은 사소한 원인으로 드러났다. 문제는 나머지였다. 보조전원장치의 반도체가 파열됐는데 이유가 분명치 않았다.
전자파가 범인으로 의심받았다. 보조전원장치의 반도체는 100만분의 1 암페어(A) 정도의 약한 전류로 작동한다. 주위에 전자파가 발생하면 순간적으로 과도한 전류가 흘러 퓨즈가 끊어지듯 반도체가 타버릴 수 있다. 철도청은 보조전원장치 전력선에 전자파 차단 장치를 추가 설치했다.
열차는 정상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철도청은 전자파가 어디서 왔는지 끝내 밝혀내지 못했다. 정밀한 전자장치가 밀집해 있는 동력차의 기계실 내부에서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었다.
전자파 사고
미국에서 일어난 도요타 차량 급발진 사고와 한국의 KTX 사고. 두 국가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벌어진 두 가지 안전사고에는 전자파라는 공통점이 있다.
미국 고속도로교통안전국(NHTSA)은 지난 3일 가속 시스템에 전자파 장해가 발생했을 가능성에 대해 “새롭게 바라보겠다”고 말했다. 미 정부가 도요타 급발진 스캔들의 원인으로 전자파를 직접 지목하고 나선 것이다. 미 하원은 23∼24일(현지시간) 이틀에 걸쳐 도요타 청문회를 진행했다. 전자파로 인한 오작동이 집중 추궁됐다. 도요타는 “법적 기준의 2배 이상 강도로 실험을 반복한 결과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맞섰다.
그러나 안전성 실험을 통과했다고 안심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여러 전자제품이 한곳에 모이면 개별 제품이 인증 받을 때와는 다른 환경이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전자파들이 뭉쳐 세기가 더 강해질 수도, 생각지 못한 주파수가 외부에서 유입될 수도 있다.
전자제품들은 저마다 민감해하는 주파수가 있다. 우연히 자신이 취약한 주파수로, 견디기 힘든 세기의 외부 전자파가 오면 기기는 이 전자파를 정상 신호로 오인할 수 있다. 유선이든 무선이든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모든 상황을 다 고려해 전자파 적합성 인증을 주는 건 불가능하다. 방송통신위원회 전파연구소 양준규 연구사는 “제품들이 뭉쳐 있을 때 오동작을 일으킬 개연성은 항상 열려 있다”고 말했다.
비상 걸린 자동차 업계
자동차 시스템은 점점 전자화되고 있다. 10여년 전만 해도 운전자가 페달을 밟거나 발을 떼면 페달에 연결된 케이블이 엔진의 연료 밸브를 직접 열고 닫았다. 반면 최신 자동차들은 페달에 장착된 센서가 페달 움직임을 감지한 뒤 그 정보를 전자제어장치에 전달한다.
이 센서 또한 자동차 안에 내장된 수많은 전자부품 가운데 하나로 전자파 간섭을 받을 수 있다. 박병일 신성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2000년부터 센서가 부착된 제품들이 도입되기 시작해 2005년 이후 급증했다. 2000㏄ 이상 고급차는 수입·국산차 가리지 않고 거의 모두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도요타 자동차 리콜 사태의 근본 원인이 부품 전자화에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면서 세계 자동차 업계는 비상이다. 일본 노무라경제연구소는 2002년 자동차 부품의 25%에 불과했던 전자장비가 올해 35%, 2014년 40%에 달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우리 정부는 1999년 이후엔 전자파와 급발진의 상관관계에 대해 조사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미국 정부가 새로운 결과를 내놓는다면 우리 정부도 태도를 바꿀 수 있다. 10여년을 끌어온 논쟁이 중대한 고비를 맞고 있다.
하이브리드, 전기차는?
더 큰 문제는 하이브리드 자동차와 전기자동차다. 이들 자동차에는 고출력·고전압 전기구동 장치가 필수적으로 들어간다. 전기구동 장치가 작동하면 전류와 전압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 전자파가 더 많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기존 차량에서 나오는 전자파와 성격도 다르다. 하이브리드 자동차와 전기차는 모터로 바퀴를 돌린다. 직류-교류를 바꿔주는 인버터와 각종 전기장치들의 전압을 조정해주는 변압기도 있다. 이들 장치가 내는 전자파는 기존 자동차 점화장치에서 나오는 전자파보다 주파수 대역이 낮다.
공인된 전자파 시험 방법도 없다. 전자파 측정 방법이 달라야 하지만 어떻게 시험해야 할지 국제 기준도 마련되지 못한 상태다. 국토해양부 산하 자동차성능연구소 관계자는 “기존 방법과 다르게 측정할 필요성은 있다. 여러 측면에서 검토하고 있지만 언제 기준을 바꿀지는 확실치 않다. 국제 동향을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연춘 서경대 교수는 “현재 자동차는 30㎒ 아래 주파수에 대해선 전자파 적합성(EMC) 검사를 하지 않고 있다. 전기차는 좀더 낮은 9㎑ 주파수부터 검사 범위에 포함시켜야 한다”며 “하이브리드 자동차와 전기차에 대한 전기적 시험 방법은 세계적 자동차 회사들의 극비 사안이다. 도요타가 가장 앞서 있는데 알려주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전자파에 대비하라
전자파 간섭이 발생할 상황은 늘고 있다. 와이브로(이동하면서도 초고속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는 무선 휴대 인터넷 서비스)와 블루투스(근거리 무선통신), RFID(전파를 이용해 먼 거리에서 정보를 인식하는 기술) 등 실생활에서 무선 제품 사용이 폭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동차 역시 마찬가지다. 수백㎑부터 10㎓까지 전 주파수 대역에 걸쳐 각종 무선전자 시스템들이 자동차에 장착되고 있다. 갈수록 자동차는 전자파 잡음의 온상이 되고 있다.
인체에 대한 연구는 더 부진하다. 전자파가 인체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관해 최근까지도 국내외 전문가들은 명쾌한 답변을 찾지 못하고 있다. 사람이 대상이라 기계만큼 다양한 조건에서 연구하기도 어렵다. 김남 충남대 교수는 “새 전자제품들이 계속 생겨나기 때문에 기계와 인체에 대한 전자파의 영향을 꾸준히 연구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key Word : 전자파
전기나 자기가 흐르면 주위에 에너지가 발생한다. 전기장과 자기장이 반복해 파도처럼 퍼져 나온다. 이를 전자파라 부른다. 가장 대표적인 게 햇빛이다. 휴대전화와 방송 전파도 전자파의 일종이다.
원하지 않는 ‘불요(不要)전자파’는 전자파 적합성(EMC) 검사에 따라 규제를 받는다. EMC 검사는 전자장비가 작동하면서 일으키는 전자파의 세기를 규제하는 EMI와 외부에서 발생한 전자파로부터 견디는 능력을 요구하는 EMS로 나뉜다. KTX 열차 내 전자기기도 이런 규제 기준에 의해 제작됐지만 사고는 발생했다. / 김원철 기자